드라마 《나빌레라》에서 70대 노인이 발레를 시작하는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솔직히 "저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인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런데 박인환 배우가 연기한 심덕출이라는 인물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제 자신의 이야기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꿈을 향한 도전보다 '늦었다'는 자기 검열이 먼저 작동했던 순간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70대 발레리노가 던지는 질문, 늦은 도전이란 무엇인가
심덕출은 극 중에서 발레단의 첫 내한 공연을 보고 어린 시절의 꿈을 다시 소환합니다. 그리고 발레 연습실을 찾아가 "거절 한마디로 포기할 생각이었으면 보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대사가 드라마 전체에서 가장 날카로운 문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자기효능감이란 어떤 과제를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의 정도를 뜻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이 믿음이 약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사회적 비교가 잦아질수록, 다른 사람의 성취를 기준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하게 됩니다.
심덕출이 발레를 배우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대부분 걱정이었습니다. 사내자식이 분 바르고 춤이나 추겠다는 거냐는 말부터,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말까지.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꺼냈을 때 돌아온 것은 응원보다 현실 점검이었고, 그 말들이 쌓이다 보니 스스로 "이건 나한테 맞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 내려버린 기억이 있습니다.
드라마가 흥미로운 지점은, 심덕출이 무대에 서기 위해 연습하는 과정에서 치매, 즉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알츠하이머(Alzheimer's Disease)란 뇌의 신경세포가 점진적으로 손상되어 기억력과 인지 기능이 저하되는 퇴행성 뇌질환입니다. 의사는 그에게 "증상의 진행 속에서도 습관처럼 해오던 것들은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대사는 드라마의 핵심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몸이 기억한다는 것, 즉 절차 기억(Procedural Memory)의 특성을 활용한 장치인데, 절차 기억이란 자전거 타기나 악기 연주처럼 반복 훈련을 통해 몸에 새겨지는 기억 유형으로, 언어적 기억보다 오래 유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꿈의 유통기한, 사회가 설계한 나이의 기준
"그 나이에 왜요?" 이 말이 얼마나 쉽게 나오는지, 저는 제가 직접 들어봤기 때문에 압니다. 새로운 시도를 꺼낼 때마다 나이는 자격 조건처럼 따라붙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기준은 어디서 온 걸까요.
사회적으로 우리는 특정 나이에 특정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규범을 내면화하고 삽니다. 사회학에서 이를 연령 규범(Age Norm)이라고 부릅니다. 연령 규범이란 특정 연령대에 기대되는 행동이나 역할이 사회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개념으로, "이 나이에는 취업을", "이 나이에는 결혼을"처럼 당연하게 통용되는 기준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문제는 이 규범이 너무 촘촘하게 설계되어 있어,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불안을 느끼게 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경직된 연령 기준이 삶의 질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나이 관련 사회적 압박이 클수록 심리적 위축이 심해지고, 새로운 학습과 도전에 대한 동기가 감소한다는 것입니다(출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심덕출이 발레 연습실을 찾아갔을 때, 선생님 채록은 처음에는 거절합니다. 하지만 그가 "한 번도 하고 싶은 걸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순간, 대화의 결이 달라집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꽤 오랫동안 멈춰 있었습니다. 그게 단순한 드라마 대사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실제 감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드는 의문 하나는, 사회가 꿈을 응원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꿈을 향해 가는 사람에게는 현실을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를 이중 메시지(Double Bind)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중 메시지란 상충되는 두 가지 기대를 동시에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받는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해도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꿈을 가지라고 하면서 동시에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그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멈춥니다.
심덕출이 주변의 반대를 넘어 무대에 서기까지 걸어간 과정에서, 저는 용기보다 지속성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창한 결단보다 매일 조금씩 연습실에 나타나는 것, 그것이 핵심이었습니다.
포기의 심리, 실패보다 무서운 것은 시작 못 하는 것
《나빌레라》를 보면서 가장 오래 남은 장면은 심덕출이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발레 동작만큼은 몸이 기억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몸이 기억한다"는 말이 드라마적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심리적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꾸준히 했다는 경험 자체가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다 포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도전한 것도 아니고 실패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시작하기 전에 가능성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때 가장 강하게 작동한 심리가 바로 결과 회피(Outcome Avoidance)였습니다. 결과 회피란 실패의 가능성 자체를 피하기 위해 도전 자체를 포기하는 심리 기제로, 실패를 경험하는 것보다 시도하지 않음으로써 가능성을 유지하려는 방어적 태도를 말합니다.
심덕출이 시작 못 할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나이, 건강, 가족의 반대, 치매 진단. 그럼에도 그가 무대에 오른 것은, 어쩌면 이런 이유들이 더 이상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드라마를 보며 저 스스로에게 물어봤던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내가 포기한 것은 정말 늦어서였는가, 아니면 실패가 두려워서였는가
- 사회의 연령 규범을 내 기준으로 내면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 시작조차 하지 않은 일 중에, 지금도 후회하는 것이 있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이 드라마보다 더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노년기 삶의 질과 목적의식 사이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에서도,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실천하는 행위 자체가 심리적 안녕감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출처: 국립정신건강센터). 즉, 결과보다 과정에서 얻는 의미가 사람을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꿈에 유통기한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 부분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환경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현실적 제약이 존재한다는 의견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적어도 시작조차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과, 해보고 나서 멈추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나빌레라》가 남긴 질문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지금 시작하기에 늦었다고 느끼는 게 있다면, 그 감정이 어디서 왔는지 한 번쯤 따져볼 가치는 충분히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오래 묵혀뒀던 일 하나를 다시 꺼내봤습니다. 아직 결과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작은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