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드라마를 보면서 울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눈이 부시게》 마지막 회를 보다가 멈칫했습니다. 한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가 화면을 가득 채우는 순간, 왜인지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빨리 지나갔으면 했던 그 날들이, 지금은 가장 그리운 시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인지 우리는 알고 있을까
당신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고 계십니까?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내내 그 질문을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시험이 싫었고, 수행평가가 지겨웠고, 매일 같은 시간에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일이 너무나 따분하게 느껴졌습니다. "얼른 졸업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졸업 후 몇 년이 지나 집을 정리하다가 졸업앨범을 펼쳤을 때, 그 순간 이상하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교실 맨 뒷자리에서 떠들던 친구, 급식시간마다 옆에 앉았던 얼굴들, 복도에서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하던 선생님. 그때는 너무 당연해서 아무 감흥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그 모습을 보는데 묘하게 마음 한편이 저릿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회고 편향(Rosy Retrospection)입니다. 회고 편향이란 지나간 사건을 실제보다 더 긍정적으로 기억하는 인지적 경향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당시에는 힘들고 지루하게 느꼈던 시간도 시간이 흐르면 아름답게 채색된다는 것입니다. 미국 심리학자 마이클 로스(Michael Ross)와 피오르 시콜리(Fiore Sicoly)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을 회상할 때 부정적 감정보다 긍정적 감정을 더 선명하게 떠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출처: APA PsycNet).
《눈이 부시게》가 저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인지 우리는 과연 알 수 있는가.
행복은 왜 항상 지나간 뒤에야 보이는가
드라마 속에서 알츠하이머를 앓는 주인공은 현재와 과거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드라마는 이 상황을 비극으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어머닌 어쩌면 당신의 가장 행복한 시간 속에 살고 계신 것일지도 모릅니다"라는 대사가 흐르는 장면에서 저는 잠시 멈췄습니다. 알츠하이머(Alzheimer's disease)란 뇌의 신경세포가 점진적으로 퇴화하면서 기억력과 인지 기능이 저하되는 퇴행성 뇌 질환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는 그 질환을 통해 오히려 '현재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역설적으로 꺼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봤는데, 이 역설이 생각보다 훨씬 와닿았습니다. 중학교 3학년 겨울, 저는 졸업식 준비 이야기가 들려오면 하루라도 빨리 이 시기가 끝났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졸업 후 어느 날 길을 걷다가 급식 냄새와 비슷한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점심시간에 줄을 서던 장면, 복도를 달리던 기억, 창가에 앉아 운동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오후가 떠올랐습니다. 솔직히 그 순간은 조금 억울하기까지 했습니다. 왜 그때는 그 순간들이 소중한지 몰랐을까 싶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현재 편향(Present Bias)과도 연결해서 설명합니다. 현재 편향이란 인간이 미래의 보상보다 즉각적인 불편함을 더 크게 느끼는 인지적 성향을 말합니다. 시험 스트레스, 반복되는 일상의 피로감이 당장의 감각을 지배하기 때문에, 그 안에 존재하는 행복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드라마가 직접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지금 삶이 힘든 당신도 이 세상에서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다
- 별거 아닌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와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
-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한 미래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망치지 말라
저는 이 대사들을 처음 들었을 때 "누구나 아는 말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이상하게 그 말들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 눈부신 시간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 현재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으로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드라마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그 말 자체는 맞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현재를 의식적으로 소중히 여기려 해도 일상의 무게는 계속 그 감각을 덮어버립니다. 학생일 때는 졸업을 꿈꾸고, 졸업하면 학창시절을 그리워합니다. 취업 준비할 때는 취업만 하면 괜찮아질 것 같고, 막상 취업하면 또 다른 고민이 찾아옵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이라고 합니다. 쾌락 적응이란 인간이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에 빠르게 익숙해지면서 행복감이 기본 수준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을 뜻합니다. 행복심리학 분야의 권위자 소냐 류보머스키(Sonja Lyubomirsky)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긍정적 사건이 주는 행복감의 지속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짧으며, 결국 인간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자극 없이는 현재의 행복을 인식하기 어렵다고 합니다(출처: Lyubomirsky Lab, UC Riverside).
제가 《눈이 부시게》를 보고 가장 오래 생각한 부분은 사실 이 지점이었습니다. 드라마는 현재를 소중히 하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것이 왜 어려운지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답을 찾아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행복한 순간을 행복이라고 알아보지 못했던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의 저에게는 가장 눈부셨던 시간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드라마를 보고 나서야 조금 더 실감했습니다.
《눈이 부시게》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평범한 하루, 밥 짓는 냄새,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군가의 아내였던 삶. 그 안에 담긴 행복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알아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드라마를 본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가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잠깐 멈춰서 지금 이 순간이 훗날의 자신에게 어떻게 기억될지 한 번쯤 떠올려보시길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