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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걸면 공기가 되던 순간, 어른이 된 내게 남은 서늘한 흉터에 대하여

by dailyinfo-lab 2026. 6. 22.

저도 처음엔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몰랐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친구들이 저를 '없는 사람' 취급하기 시작했고, 그 이유를 끝내 듣지 못했습니다. 영화 《우리들》을 보다가 그 시절 감각이 다시 피부로 올라오는 것 같아 한동안 멈춰 있었습니다. 단순한 아이들 싸움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가 건드리는 감정의 층위는 생각보다 훨씬 깊습니다.

여름방학이 끝나면 세상이 바뀐다 — 아이들의 관계 맥락

혹시 새 학기가 시작되던 날, 어제까지 함께 웃던 친구가 갑자기 모른 척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영화 속 선이는 깍두기, 즉 집단에서 공식적으로 배제된 아이입니다. 피구 경기에서 규칙도 아닌 이유로 밖으로 쫓겨나고, 청소를 대신 해줘도 돌아오는 건 무시뿐입니다. 제가 직접 겪어봤는데, 이 장면이 유독 정확하게 느껴졌습니다. 왕따란 단순히 욕을 듣거나 맞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가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 그 감각, 말을 걸면 공기가 되는 그 순간이 때로는 더 오래 남습니다.

발달심리학(developmental psychology)에서는 초등학교 중반기인 만 8~10세를 또래 관계가 자아 형성의 핵심 축이 되는 시기로 봅니다. 여기서 발달심리학이란 인간이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까지 심리적·사회적으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이 시기에 또래 집단에서 수용되느냐 거부되느냐는 단순한 감정 문제가 아니라, 이후 자기효능감과 사회적 신뢰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아동의 또래 관계 경험이 성인기 대인 관계 패턴에까지 이어진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여러 논문에서 반복 확인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아동학회).

선이가 지아에게 팔찌를 건네고 일주일 동안 함께 지내는 장면은 그래서 단순한 우정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외부 세계가 거부한 두 아이가 서로에게 유일한 안전 기지(safe base)가 되는 순간입니다. 여기서 안전 기지란 애착 이론에서 말하는 개념으로, 개인이 심리적 위협을 느낄 때 돌아올 수 있는 안정적인 관계적 근거지를 뜻합니다.

왜 아이들은 서로를 배척할까 — 집단 역학의 민낯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그 잔인함은 정말 아이들만의 것일까요?

집단 역학(group dynamics)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집단 역학이란 집단 내부에서 구성원들 사이에 형성되는 권력 구조, 응집력, 배제와 수용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심리학 개념입니다. 교실이라는 공간은 이 집단 역학이 압축적으로 작동하는 무대입니다. 영화에서 보라가 지아에게 1등 자리를 빼앗기자 태도가 급변하는 장면은, 집단 내 서열이 위협받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공격적 배제 반응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당시 저는 무리에서 소외된 이유가 제 성격이나 행동 때문이라고 오래 믿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냥 그 집단에 새로운 위계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저는 타이밍이 나빴을 뿐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누군가를 배척하는 건 그 대상이 특별히 나쁜 아이여서가 아니라, 집단이 자신의 결속력을 확인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내집단 편향(in-group bias)이라고 부릅니다. 내집단 편향이란 자신이 속한 집단의 구성원에게는 호의적으로, 외부 집단 구성원에게는 차별적으로 대하는 심리적 경향입니다. 문제는 이 편향이 아이들의 교실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성적, 거주 지역, 부모 직업으로 사람을 서열화하는 어른들의 문화가 아이들의 언어로 번역되어 교실로 흘러 들어갑니다.

교육부의 2023년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초등학교 학교폭력 피해 유형 중 언어폭력(34.0%)에 이어 집단따돌림(13.3%)이 두 번째로 높은 비율을 차지했습니다(출처: 교육부). 피를 흘리지 않아도 상처는 남는다는 것, 이 숫자가 조용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지아가 선이의 아빠가 알코올 중독자임을 칠판에 적는 장면은 이 모든 구조의 정점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가장 깊은 곳의 비밀을 무기로 사용하는 순간, 배신의 충격은 단순한 다툼과 차원이 다릅니다.

그 경험은 어른이 된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저는 한 가지 질문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내가 받은 상처는 지금의 나에게 어떤 형태로 남아 있을까?

제가 직접 겪어봤는데, 그 시절의 따돌림은 단순히 '아팠던 기억'으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무리에 속하고 싶어서 원하지 않는 농담에 웃어줬던 기억, 관심도 없는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던 기억이 어른이 되어서도 반복되는 패턴으로 이어졌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불안 애착(anxious attachment)의 특징적인 행동으로 설명합니다. 불안 애착이란 어린 시절 관계에서 충분한 정서적 안정을 경험하지 못했을 때 형성되는 애착 유형으로, 거부당할까 봐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거나 관계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영화 《우리들》이 인상적인 건 선이가 끝에서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체육 시간, 예전 자신처럼 소외된 지아 옆에 서는 선이의 선택은 작지만 분명한 전진입니다. 상처받은 경험이 오히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아보는 감각이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들의 배척을 바라볼 때 중요한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배척은 특정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 구조의 문제임을 인식한다.
  • 아이가 말하지 않는다고 아무 일도 없는 것이 아니다. 미세한 변화에 주의를 기울인다.
  • 배척당한 경험이 이후 관계 패턴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어른들이 먼저 이해한다.
  • 가해자를 단순히 나쁜 아이로 규정하기보다, 그 아이가 처한 불안과 압박을 함께 살핀다.

어른이 된 지금, 그 시절의 제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었다고. 그리고 지금 교실 어딘가에 있을 선이들에게도 같은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참고: 영화 '우리들'은 티빙에서 스트리밍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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