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포기해야겠다고 결심했던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드라마 《멜랑꼴리아》를 보면서 그 시절이 생각났고, 동시에 오랫동안 마음 한켠에 묵혀 두었던 질문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포기한 줄 알았던 것들이 정말 사라진 건지, 아니면 단지 늦게 다시 찾아오는 중인지.
진로를 포기했을 때, 정말 포기한 게 맞을까
일반적으로 진로 변경을 반복하면 실패한 사람처럼 보인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그건 절반만 맞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심리상담사를 꿈꾸다가 임상병리사로, 다시 방사선사로 진로를 바꿨습니다. 방사선사란 X선, CT, MRI 등 의료 영상 장비를 다루며 질병 진단을 돕는 의료기사 직군을 말합니다. 자격증도 취득했고 실제로 그 분야에서 일도 했으니 겉으로는 안정적인 선택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직업 자체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른다는 감각이 늘 남아있었습니다.
《멜랑꼴리아》 속 주인공 백승유는 고등학교 시절 만난 수학 교사로 인해 수학에 눈을 뜨고, 결국 세계 수학자 올림픽에서 필즈상(Fields Medal)에 해당하는 최고 권위의 상을 받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여기서 필즈상이란 4년마다 열리는 세계 수학자 대회에서 40세 미만의 수학자에게 수여되는 상으로,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립니다. 그 인물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재능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과의 만남이 방향을 바꿨다는 설정이었습니다.
제 경우도 비슷했습니다. 방사선사로 일하던 중 창작 활동을 시작했고, 그림을 그리고 이모티콘을 제작하고 스톡 이미지를 만드는 시간이 유독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이모티콘 제작이란 메신저 플랫폼에 등록하여 판매하는 감정 표현 이미지 시리즈를 의미하며, 기획부터 드로잉, 심사 통과까지 모든 과정을 개인이 독립적으로 진행하는 방식입니다. 처음엔 취미라고 생각했는데, 공모전에서 떨어지고 심사에서 탈락해도 다시 만들고 싶었습니다. 결과 때문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진로 적합성 연구에서는 개인의 흥미와 직업 환경이 일치할수록 직무 만족도와 지속 의지가 높아진다는 결과가 꾸준히 제시되어 왔습니다(출처: 한국직업능력연구원). 흥미-환경 일치도란 개인의 성격 유형과 직업 환경이 얼마나 잘 맞는지를 나타내는 심리적 적합 지표입니다. 제가 창작 활동을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었는데도 계속 돌아오게 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신호였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포기한 줄 알았던 순간들을 돌아보면, 그것들이 다음과 같은 형태로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다시 시도하게 되는 반복
- 다른 분야를 배우면서도 자꾸 비교하게 되는 관심
- 뚜렷한 이유 없이 특정 작업을 할 때만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는 감각
이 세 가지가 있다면, 그건 포기한 게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과 없는 노력은 의미 없는 것일까
《멜랑꼴리아》가 불편하게 만드는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드라마 속 학교는 결과만을 기준으로 모든 걸 판단합니다. 성적이 높아야 인정받고, 스펙이 좋아야 기회를 얻으며, 뒤에서 어떤 방식을 썼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입학 전형에서 특정 학생들에게만 유리한 교재를 제공하고, 그 사실을 은폐하는 구조가 드라마의 핵심 갈등입니다.
일반적으로 노력하면 결과가 따라온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이 공식은 조건이 공평할 때만 어느 정도 성립합니다. 출발선이 다르고, 정보 접근성이 다르고, 네트워크가 다른 상황에서 결과만으로 노력을 평가하는 건 처음부터 전제가 틀린 이야기입니다.
드라마에서 백승유가 수학을 증명하는 방식과, 교장이 비리를 감추는 방식은 대조적으로 묘사됩니다. 수학적 증명(Mathematical Proof)이란 공리와 논리적 추론만으로 명제의 참과 거짓을 확정하는 과정입니다. 거짓은 개입될 여지가 없고, 과정이 틀리면 결론도 틀립니다. 드라마가 이 구조를 상징적으로 활용한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습니다.
제가 창작 활동을 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공모전에서 탈락했을 때 결과만 보면 노력이 무의미해 보였지만, 그 과정에서 구성력이 늘었고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구성력이란 시각적 요소들을 화면 안에서 의도적으로 배열하고 균형을 잡는 능력을 의미하며, 단기간에 쌓이기 어려운 감각적 역량입니다. 결과가 없었어도 그 경험 자체는 남아 있었고, 다음 작업에 반영되었습니다.
교육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의 축적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자기효능감이란 특정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개인의 믿음을 뜻하며, 반두라(Bandura)의 사회인지 이론에서 핵심 개념으로 다루어집니다. 이 개념에 따르면 작은 성공 경험의 반복이 자기효능감을 높이고, 실패하더라도 지속하는 힘을 만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한국교육심리학회).
결과 없는 노력을 무의미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성장이 일어나는 시점은 대체로 결과를 얻는 순간이 아니라, 결과가 없어도 다시 시작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결과 중심 사고와 과정 중심 사고의 차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결과 중심: 성공 여부로 노력의 가치를 소급하여 판단
- 과정 중심: 시도 자체를 통해 쌓이는 역량과 방향성을 중시
- 장기적 관점: 실패한 시도들이 이후 성공의 조건을 만드는 경우가 많음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입니다. 거짓이 참처럼 통용되는 구조 안에서, 진짜 참을 증명하는 일이 여전히 의미 있는가. 저는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증명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멜랑꼴리아》를 보고 나서 남은 감각은 단순한 드라마 감상이 아니었습니다. 포기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다른 형태로 계속 곁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결과보다 과정이 자신을 더 분명하게 만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찾는 데 오래 걸렸다면, 그 시간들이 낭비였던 게 아니라 필요한 우회였을 수 있습니다. 지금 어떤 선택 앞에 서 있다면, 결과보다 먼저 자신이 무엇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지를 살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