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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택시 시리즈 (방관, 사적 제재, 법의 한계)

by dailyinfo-lab 2026. 5. 29.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저는 《모범택시》 3까지 보고 다시 시즌 1과 2를 몰아보면서 그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드라마 속 이야기가 단순히 통쾌한 복수극으로 끝나지 않고, 중학교 시절 제가 외면했던 한 친구의 얼굴을 계속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그 시절

중학교 때 저희 반에는 유독 한 친구를 집중적으로 놀리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가벼운 장난이라고 생각했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군가의 실수를 웃음거리로 삼거나, 별명을 큰 소리로 부르는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걸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놀림의 대상은 늘 같은 친구였고, 급식 시간에 일부러 그 친구 옆자리를 피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 친구는 웃는 척했지만 갈수록 말이 없어졌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알겠는데, 그 침묵이 얼마나 무거운 신호인지 그때의 저는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괜히 나서다가 미움을 살까 봐,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이 될까 봐 그냥 모른 척했습니다. 이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방관자 효과란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개인이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고 도움 행동을 미루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1968년 심리학자 존 달리와 빕 라타네가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오늘날 학교 폭력 연구에서도 핵심 기제로 다루어집니다.

《모범택시》 속 피해자들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성실하게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강마리아는 직장 상사의 착취와 폭력을 당하면서도 공권력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건 외면이었습니다. 그녀를 다시 위기 상황으로 내몬 건 가해자만이 아니라 "그냥 넘어가라"는 주변의 무관심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보였던 태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드라마를 보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모범택시》가 시즌마다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피해자의 공통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피해 사실을 공식 채널(경찰, 학교, 직장 등)에 알렸지만 묵살당한 경험이 있다.
  • 가해자가 지역 사회나 조직 내 권력자와 연결되어 있어 신고가 무력화됐다.
  • 주변인들이 알면서도 개입을 꺼렸고, 피해자는 점점 고립됐다.

이 세 가지 조건이 갖춰지면 사람들은 제도 밖의 해결책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모범택시라는 설정 자체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의 제도적 공백을 정확하게 짚은 장치처럼 느껴졌습니다.

사적 제재는 정의가 될 수 있을까

《모범택시》를 보면서 가장 오래 걸린 건, 통쾌함 이후에 찾아오는 묘한 불편함을 정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악인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는 장면에서 분명히 시원한 감정을 느꼈는데, 그 장면이 끝나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거든요.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드라마가 작동하는 방식에 있었습니다. 《모범택시》는 사적 제재(Private Justice)가 정당화되기 위한 전제 조건을 매우 촘촘하게 설계합니다. 여기서 사적 제재란 국가 공권력을 통하지 않고 개인 또는 집단이 직접 가해자에게 응보적 행동을 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드라마 속에서는 피해자가 분명하고, 가해자는 명확하게 악하며, 법은 언제나 늦게 도착합니다. 이 구조가 반복될수록 시청자는 "이 경우에는 사적 제재가 맞다"는 결론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세 가지 전제 중 어느 하나도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습니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양쪽의 주장이 엇갈리는 경우가 훨씬 많고, 법이 느리게 작동하는 이유 중 일부는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절차를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법치주의(Rule of Law)란 어떤 권력자도 법 위에 설 수 없고, 분쟁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해결한다는 원칙입니다. 이 원칙이 흔들리면 "정의로운 사람"의 기준이 개인마다 달라지고, 결국 힘 있는 사람의 사적 폭력이 정의로 포장될 여지가 생깁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학교폭력 실태 조사에 따르면, 학교폭력 피해 학생의 상당수가 주변에 알렸음에도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했다고 응답했습니다(출처: 국가인권위원회). 이 수치는 《모범택시》의 핵심 설정이 단순한 극적 과장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피해자들이 공식 제도에 실망하는 현실 자체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법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른 문제입니다. 법이 미흡하다는 사실과, 그래서 사적 제재가 대안이 된다는 결론 사이에는 꽤 긴 거리가 있습니다. 법을 보완하는 방향과 법을 우회하는 방향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가해자 처벌보다 피해자 회복과 공동체 관계 복원에 초점을 맞추는 사법 패러다임으로, 최근 학교폭력·소년범죄 영역에서 대안적 접근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회복적 사법 프로그램을 적용했을 때 피해자의 심리적 회복 만족도가 기존 형사 절차보다 유의미하게 높게 나타났습니다(출처: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결국 드라마를 보면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복수 자체를 원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억울함을 제대로 들어줄 누군가를 원하는 걸까. 저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범택시》가 통쾌하면서도 씁쓸한 이유는, 현실에는 그 억울함을 들어줄 제도와 사람이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시즌 3까지 모두 보고, 시즌 1과 2를 몰아보면서 저는 통쾌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꼈습니다.악인들이 벌을 받는 장면에서는 속이 시원했지만, 한편으로는 왜 피해자들이 그런 상황에 놓일 때까지 아무도 도와주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한, 드라마를 다 보고 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중학교 시절의 그 친구가 떠올랐고, 그때의 저는 직접 괴롭히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손을 내민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모범택시》를 보면서 가장 크게 남은 건 통쾌한 복수보다도 누군가의 침묵이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현실에는 모범택시 같은 존재는 없습니다, 누군가의 억울함을 대신 해결해 주는 영웅도 없고,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괴롭히는 상황을 봤을 때 "그만해"라고 말하는 일은 생각보다 거창한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 누군가에게 필요한 건 모범택시가 아니라,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 단 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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