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퇴사하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어른'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허구에 가까운지를요. 매달 월급이 들어오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그 울타리가 사라지고 나니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자였다는 사실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를 다시 보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고, 그 이후로 서툰 오늘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완벽한 어른이라는 착각, 왜 생겼을까
퇴사 후 처음 몇 주는 정말 이상한 시간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도 갈 곳이 없고, 노트북 앞에 앉아도 뭘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보다 더 저를 짓눌렀던 건 "나는 왜 아직도 이 모양이지?"라는 자책이었습니다. 남들은 다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은데, 저만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은 기분. 그 감각이 꽤 오래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이 감각은 저만의 것이 아닙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사회 비교 이론(Social Comparison Theory)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회 비교 이론이란, 인간이 자신의 능력이나 상황을 타인과 비교함으로써 자기 평가를 내리려는 심리적 경향을 말합니다. 1954년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가 처음 제안한 개념인데, 특히 불확실한 상황에 놓였을 때 이 비교 심리가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비교하는 대상이 타인의 '결과'이지 '과정'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SNS에 올라오는 건 누군가의 성과이지,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서툰 처음을 거쳤는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건 정말 함정에 가깝습니다. 남의 겉면을 내 속면과 비교하는 셈이니까요.
실제로 국내 성인의 자기효능감(Self-Efficacy) 수준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30대 초중반 직장인이 이직 또는 퇴사 직후 자기효능감이 가장 급격히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효능감이란 "나는 이 상황을 해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이 수치가 낮을수록 작은 도전도 크게 느껴지고, 비교 심리에 더 취약해집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나만의 속도, 달팽이의 보폭을 인정하기까지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지호라는 인물이 특히 기억에 남았습니다. 꿈꾸던 작가의 길에서 계속 넘어지면서도, 그 인물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 한참 생각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단순했습니다. 지호는 자신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에게 조금 더 관대했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반대였습니다. 퇴사 후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처음 쓴 글 하나하나에 스스로 점수를 매겼습니다. "이 문장은 왜 이리 어색하지", "이 주제는 너무 평범한 거 아닌가" 같은 식으로요. 지금 돌아보면 완벽한 어른에 대한 강박이 그 자책의 원인이었습니다. 처음 하는 일인데 처음부터 능숙하길 바랐던 겁니다.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서는 인간의 내재적 동기가 유지되려면 세 가지 심리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율성(Autonomy), 유능감(Competence), 관계성(Relatedness)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유능감이란 자신이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경험에서 오는 감각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유능감이 타인과의 비교가 아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서 느껴질 때 가장 지속적이라는 점입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 APA).
이번 생이 처음이라는 드라마의 메시지를 심리학적으로 풀어보면, 결국 자기 기준의 유능감을 회복하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남들의 속도가 기준이 되는 순간, 내 걸음은 언제나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서툰 처음을 지나는 분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관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비교의 대상을 '타인의 결과'가 아닌 '어제의 나'로 바꾸는 것만으로 자책의 강도가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 처음 하는 일에서의 서툼은 능력 부족이 아닌 경험치 누적의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 달성 목표보다 '오늘 시도한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내재적 동기를 유지하는 데 더 효과적입니다.
서툰 오늘에 건네는 자기위로의 기술
마지막으로 제가 가장 실질적으로 도움이 됐다고 느끼는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드라마를 보고 나서 저는 밤에 자기 전 아주 짧은 루틴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제가 처음 마주한 순간이 무엇인지 떠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보내본 협업 메일, 처음 올려본 글, 처음 경험한 거절. 그 모든 것이 이번 생에서 진짜 처음이었다고 떠올리면, 자책보다 "이만하면 됐다"는 감각이 조금씩 생겼습니다.
자기위로,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향한 의식적인 위로 행위는 단순한 자기 합리화와 다릅니다. 자기자비(Self-Compassion)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는 자신의 실패나 부족함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공통된 경험으로 인식하고, 그 자신에게도 친구에게 하듯 따뜻하게 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크리스틴 네프(Kristin Neff)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자기자비 수준이 높은 사람은 실패 후 회복 탄력성(Resilience)이 더 빠르고, 장기적 동기 유지에도 유리하다는 결과가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회복 탄력성이란 어려운 상황에서 다시 일어나는 심리적 회복력을 뜻합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처음에는 어색했습니다. "오늘도 잘 버텼어"라는 말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거든요. 하지만 반복하다 보니 그 말이 조금씩 진짜가 됐습니다. 자기위로는 기술이고, 기술은 반복해야 늘더라고요.
《이번 생은 처음이라》가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는 등장인물들이 완벽한 어른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도 사랑도 처음이고, 나이도 처음 먹어보고, 오늘이라는 날도 처음 살아보는 중이었습니다. 그 서툼이 결함이 아니라 삶의 조건 자체라는 것, 드라마는 그것을 조용히 말하고 있었습니다.
완벽한 어른이 되려고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오늘 처음 마주한 이 순간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그것만으로 충분히 잘 해내고 있는 겁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티빙,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왓챠에서 모두 감상하실 수 있으니, 지친 날 밤에 한 번 꺼내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이번 생은 처음이라》 주요 스트리밍 플랫폼 티빙 (TVING): tvN 본진 드라마인 만큼 당연히 스트리밍 가능합니다. 가장 안정적인 화질로 감상할 수 있어요. 넷플릭스 (Netflix): 현재 라이센스가 유지되고 있어 전 회차 스트리밍이 가능합니다. 디즈니플러스 (Disney+): 국내외 드라마 라인업에 포함되어 있어 구독 중이시라면 바로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왓챠 (WATCHA): 특유의 큐레이션과 함께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