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처음 코코를 틀었을 때는 그냥 아이들 애니메이션이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엔딩 장면이 끝나고 나서 한참 동안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이 영화가 건드린 건 단순한 가족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기억한다는 것이 곧 존재한다는 것이라는, 꽤 묵직한 명제였습니다.
망각의 공포 — 두 번 죽는다는 것의 의미
코코가 다른 애니메이션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그리는 방식에 있습니다. 픽사(Pixar)는 이 영화에서 사자(死者)의 땅에서도 또 한 번 소멸이 일어난다는 설정을 도입했습니다. 산 자의 세계에서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않게 되는 순간, 사자의 땅에서도 영구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영화계에서는 이를 '이중 소멸(Double Oblivion)' 구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중 소멸이란,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기억에서 지워지는 두 번째 죽음이 찾아온다는 서사 장치로, 코코는 이 개념을 멕시코 전통 명절인 디아 데 로스 무에르토스(Día de los Muertos)와 결합해 매우 정교하게 구현했습니다. 디아 데 로스 무에르토스란 매년 11월 1일과 2일에 걸쳐 조상의 영혼을 기리는 멕시코 최대의 전통 축제를 말합니다.
헥토르가 온몸의 빛을 잃어가며 서서히 형체가 흐려지는 장면은 저에게 꽤 오래 남았습니다. 그 장면이 무섭게 느껴진 이유는 특수효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기억에서 지워진다는 공포가 생각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미국심리학회(APA)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타인에게 기억되고 싶어 하는 욕구는 생존 본능과 맞닿아 있는 기초적인 심리 동기 중 하나라고 합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
추억의 역설 — 그때로 돌아가도 행복할까
코코를 보고 나서 한동안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추억 자체를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 아름답게 기억하는 걸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자주 가던 학교 앞 문방구 이야기를 하자면, 사실 당시에는 그냥 과자 사 먹고 장난감 구경하는 곳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뒤 그 자리를 지나갔을 때 문방구가 사라지고 전혀 다른 가게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처음엔 길을 잘못 찾은 줄 알고 몇 번이나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고작 문방구 하나가 없어진 것뿐인데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허전했습니다.
그때 깨달은 게 있었습니다. 그 문방구가 사라진 것이 아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 있던 시간들이 이제 완전히 닫혔다는 사실이 아쉬웠던 겁니다. 학창시절에는 시험도 싫고 수행평가도 싫고 빨리 졸업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때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떠들던 기억이 문득문득 그리워집니다. 만약 지금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정말 행복할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시험 공부를 다시 해야 하고, 수행평가 불안감을 다시 느껴야 하니까요.
심리학에서는 이를 장밋빛 회상 편향(Rosy Retrospection Bias)이라고 부릅니다. 장밋빛 회상 편향이란 과거의 경험을 실제보다 더 긍정적으로 기억하는 인지적 경향을 말하며, 현재의 불편함을 실시간으로 경험할 때보다 나중에 회상할 때 그 강도를 훨씬 낮게 평가하는 현상입니다. 코코는 이 심리를 아주 정확하게 포착한 영화입니다.
기억과 존재 —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야 살아있다
코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사실 화려한 사자의 땅 비주얼이 아니었습니다. 말년의 코코 할머니가 미구엘의 노래를 듣고 서서히 기억을 되찾는 장면이었습니다. 치매(Dementia)로 대부분의 기억을 잃어버린 노인이 오래된 노래 한 곡에 반응하는 그 순간은, 단순한 애니메이션 클라이맥스를 넘어선 무언가였습니다. 치매란 뇌의 신경세포 손상으로 인해 기억력, 언어력, 판단력 등의 인지 기능이 점진적으로 저하되는 질환을 말합니다.
실제로 음악 기억은 치매 환자에게도 비교적 오래 보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음악이 처리되는 뇌 영역이 언어나 일반 기억을 담당하는 영역과 다르기 때문인데, 이를 음악 기억의 저항성(Preservation of Musical Memory)이라고 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음악 요법을 치매 환자 돌봄에 활용할 수 있는 비약물적 개입 방법 중 하나로 인정하고 있습니다(출처: 세계보건기구).
코코가 헥토르의 노래를 기억하는 순간, 그는 단순히 딸의 기억 속에 살아남은 것이 아닙니다. 코코가 살아있는 한, 헥토르도 사자의 땅에서 존재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기억이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존재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해봤습니다.
코코를 보기 전에 알면 좋은 것들
영화를 더 깊이 즐기기 위해 알아두면 도움이 되는 배경 정보를 정리했습니다.
- 배경이 된 디아 데 로스 무에르토스는 죽음을 슬픔이 아닌 축제로 대하는 멕시코 고유의 문화이며, 2008년 유네스코(UNESCO)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 영화 속 헥토르의 노래 '기억해줘(Remember Me)'는 픽사 역사상 처음으로 오리지널 곡으로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수상한 곡입니다.
- 코코는 2017년 개봉 이후 전 세계 누적 흥행 수익 8억 달러(약 1조 원) 이상을 기록했으며, 멕시코 현지 역대 흥행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 영화 제작 과정에서 픽사 팀은 멕시코 현지를 수차례 방문하며 오아하카(Oaxaca) 지역의 전통 알레브리헤(Alebrijes) 공예와 건축 양식을 참고했습니다. 알레브리헤란 멕시코 전통 민속 예술에서 등장하는 형형색색의 상상 속 동물 조각을 말합니다.
코코는 분명 가족 영화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기억에 대한 영화로 더 오래 남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흐려질 수 있다는 사실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코코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그냥 아이들 애니메이션이라고 넘기지 마시길 권합니다. 가족이나 오래된 친구와 함께 보고 나서 이야기를 나눠보시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