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이 드라마를 처음 봤을 때 그냥 자극적인 설정의 학원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말까지 다 보고 나니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이유로 '기생수'라는 말을 들으며 방황했던 기억이 자꾸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가 단순한 픽션이 아니라 학교라는 공간의 권력 구조를 꽤 정확하게 해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등급제라는 이름의 구조적 폭력
드라마 속 '피라미드 게임'의 핵심은 등급 시스템입니다. 매달 마지막 주 목요일, 학생들은 어플로 투표를 진행하고 득표 수에 따라 A부터 F까지 등급이 나뉩니다. 여기서 F등급이란 반 전체로부터 합법적으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해도 되는 최하위 계층을 의미합니다. 이 시스템에서 가장 교묘한 부분은 '강제성이 없다'는 전제입니다. 참여를 거부할 수 있지만, 거부하는 순간 자동으로 F등급이 되는 구조입니다. 이건 자유의지처럼 포장된 강압, 즉 심리적 코어션(coercion)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코어션이란 선택지를 제공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특정 행동을 강요하는 심리적 압박 메커니즘을 뜻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보면, 당시에도 비슷한 구조가 존재했습니다. 대놓고 왕따를 지정하는 시스템은 없었지만, 특정 타이틀이 붙으면 보이지 않는 등급이 생겨났습니다. 저는 그 타이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오히려 더 엇나가고 학교를 피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 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학교 내 위계 구조는 한국 교육 현장에서도 실증적으로 확인됩니다. 교육부의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피해 학생의 34.7%가 '여러 명에게 동시에' 피해를 입었다고 응답했습니다(출처: 교육부). 단순한 개인 간 갈등이 아니라 집단 역학이 작동하는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수치가 말해줍니다.
방관자 효과와 공범의 경계
드라마에서 가장 불편하게 느꼈던 장면은 괴롭힘 자체가 아니라, 괴롭힘을 지켜보는 다수의 표정이었습니다. 이 심리 현상은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로 설명됩니다. 방관자 효과란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개인이 느끼는 도덕적 책임감이 분산되어 아무도 개입하지 않게 되는 현상을 뜻합니다. 1964년 뉴욕에서 발생한 키티 제노비스 사건을 계기로 심리학자 비브 라타네와 존 달리가 처음 체계적으로 연구한 개념입니다.
드라마 속 2학년 5반 학생들이 딱 그렇습니다. 게임이 부조리하다는 걸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하린이라는 권력 구조 앞에서 개인의 양심은 집단의 침묵에 묻혀버립니다. 수지가 F등급을 당하는 동안 친구들이 보인 반응은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는 안도감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심리는 실제 학교에서도 똑같이 작동합니다. 제가 방황하던 시절, 저를 챙겨주는 친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악의적으로 괴롭히는 친구도 많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은 그냥 모른 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른 척이 저에게는 가장 오래 남는 상처였습니다.
다만 저는 방관자들을 단순히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구조 자체가 개입을 불가능하게 만들도록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오히려 더 무서운 부분입니다.
교육자의 역할과 책임 방기
이 드라마에서 제가 가장 분노했던 대목은 담임 선생님의 존재 방식이었습니다. 수지가 용기를 내어 담임에게 도움을 청하는 장면이 있는데, 알고 보니 그 선생님은 학폭 환경을 이용해 학부모에게 돈을 뜯어내는 인물이었습니다. 저에게 교육자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되 아이들의 주체적 사고에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교사는 학생들의 취약성을 착취하는 구조의 공모자였습니다.
저도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과의 관계가 제 인생을 바꾼 경험이 있습니다. 방과 후 교실 청소를 돕고 선생님 업무를 거들면서, 제가 그동안 한 행동들이 부끄럽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선생님이 직접 뭔가를 강요한 것도, 훈계를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옆에서 함께 일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게 교육자의 역할이라고 저는 지금도 생각합니다.
교육적 개입 방식에 관해 연구자들도 비슷한 방향을 지지합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보고에 따르면, 학교폭력 예방에 가장 효과적인 요인은 '담임교사의 정서적 지지'가 학생 자존감 및 또래 관계 회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결국 교사 한 명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학급 전체의 심리적 안전망 구축 여부를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교사의 실패는 단순한 개인 비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별관에 CCTV가 없고, 2학년 5반만 본관과 고립되어 있다는 설정은 구조적 방치가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피라미드를 부수는 방법: 성수지의 전략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성수지라는 캐릭터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가 초인적인 신체 능력이나 배경 권력으로 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지가 사용하는 방법은 사회 네트워크 분석(Social Network Analysis)에 가깝습니다. 사회 네트워크 분석이란 개인들 사이의 관계망을 시각화하고, 어느 노드(인물)가 집단의 결속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지 파악하는 분석 방법론입니다. 수지는 직관적으로 이것을 해냅니다. 투표 결과를 분석해 백하린이 표의 흐름을 통제하고 있다는 걸 알아내고, 등급 하위 학생들의 연대(Coalition Building)를 통해 피라미드 구조 자체를 마름모 형태로 전환시키는 계획을 세웁니다. 여기서 코얼리션 빌딩이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연합해 기존 권력 구조에 대항하는 전략을 의미합니다.
수지의 전략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투표 데이터를 직접 분석해 권력의 핵심 노드를 파악한다
- 수기 투표 방식을 제안해 글씨체로 표의 흐름을 역추적한다
- C등급 이하 학생들의 연대를 구성해 피라미드 하부를 넓힌다
- 서도와처럼 중립을 유지하는 인물의 숨겨진 동기를 파악해 간접적으로 활용한다
제가 이 장면들을 보면서 든 생각은, 수지가 쓰는 방법이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혼자 해결하려 하지 않고 구조 자체를 바꾸려 한다는 점에서 저는 이 캐릭터에게 동의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혼자 방황을 멈추고 선생님 업무를 도우며 조금씩 관계를 회복했던 방식도, 결국은 제가 속한 공간의 구조에 조용히 다시 편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거창한 저항이 아니라 지속적인 존재감이 결국 변화를 만들었습니다.
드라마의 비판적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게임을 없애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명자의 말처럼 한 명이 사라진다고 시스템이 끝나지 않습니다. 가해자도, 방관자도, 심지어 교사도 이미 그 구조 안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아마 우리가 그 구조를 실제로 경험해봤기 때문일 겁니다. 피라미드 게임을 단순히 자극적인 설정으로만 소비하기보다는, 지금 내 주변에 방관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은지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보시길 권합니다. 저도 그 시절의 제 행동을 돌아보면 여전히 부끄러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 부끄러움이 쌓여서 결국 지각 한 번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것처럼,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첫 번째 변화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