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규칙이란 게 누구에게나 똑같이 작동한다고 믿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웠고, 그 믿음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38사기동대》를 보면서 그 믿음이 얼마나 단순했는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세금 징수관과 전과 5범 사기꾼이 손을 잡고 고액 체납자를 상대하는 이 드라마는, 단순한 통쾌함 이상의 질문을 던집니다.
같은 규칙인데 왜 결과가 다를까
《38사기동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세금 징수관 백성일이 무려 57억 7천만 원의 체납 세금을 안고 있는 마진석을 상대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법대로라면 간단히 해결될 것처럼 보이는 문제가,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진석은 22개 법인 어디에도 자기 이름을 올려두지 않은 채 재산을 운용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명의신탁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명의신탁이란 실제 소유자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재산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세금 추적을 어렵게 만드는 대표적인 수법입니다.
저도 비슷한 감각을 살면서 여러 번 느꼈습니다. 같은 실수를 해도 어떤 사람은 가볍게 넘어가고, 어떤 사람은 큰 책임을 집니다. 처음에는 운이 나쁜 거라고 생각했는데,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점점 의문이 쌓였습니다. 혹시 규칙 자체가 아니라 규칙이 적용되는 방식이 문제인 건 아닐까 하고요.
드라마에서도 이 점이 반복해서 드러납니다. 오양그룹 불법 다단계 사기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다단계 판매란 기존 가입자가 새 가입자를 모집하며 수익을 올리는 구조인데, 불법 다단계는 이 구조를 이용해 실질적인 상품 없이 자금을 돌리는 방식입니다. 드라마 속 오양그룹은 정치적 연줄과 자금력을 동원해 이 사건을 덮었고, 피해자들은 오히려 법망 밖에 방치되었습니다. 이 장면이 유독 불편하게 느껴진 건 아마도 실제 현실과 너무 닮아 있어서였을 겁니다.
조세정의(租稅正義), 즉 세금 부담이 경제적 능력에 따라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세법의 근간입니다. 그런데 드라마가 보여주는 것은 이 원칙이 글 위에서는 존재하지만 현실에서는 힘 있는 쪽에 유리하게 굴절된다는 사실입니다. 규칙이 없는 것보다 무서운 건 규칙이 선택적으로 작동할 때라는 생각, 드라마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명의신탁을 통한 재산 은닉으로 합법적 추적이 어려워지는 구조
- 정치적 연줄과 자금력이 법 집행의 강도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
- 체납세금이 있어도 실질적 징수가 어려운 제도적 공백
- 규칙의 존재보다 적용 방식이 신뢰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
실제로 국세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국내 고액·상습 체납자의 체납액 합계는 약 99조 원에 달합니다(출처: 국세청). 이 수치를 보면 드라마가 그냥 픽션이 아니라는 게 실감납니다.
기회의 평등, 정말 존재하는 걸까
드라마를 보면서 또 하나 마음에 걸린 건 출발선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하면 된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저도 그 말을 그냥 받아들였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전제에 물음표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정말 같은 출발선에 서 있는 걸까요?
《38사기동대》에서 양정도라는 인물은 흥미롭게도 기획부동산 사기와 보이스피싱 등 각종 수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합니다. 기획부동산이란 개발 가능성이 없는 땅을 마치 곧 개발될 것처럼 속여 팔아넘기는 사기 방식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 방법들을 익히게 된 배경을 따라가다 보면, 단순히 '나쁜 사람'이라는 설명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는 권력자들이 만들어 놓은 구조 안에서 가장 밑바닥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찾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가장 불편하면서도 정직하게 느껴졌습니다. 사회가 기회의 평등을 이야기하지만, 누군가는 더 많은 정보와 더 두꺼운 연줄을 갖고 시작합니다. 사회이동성(社會移動性)이란 개인이 태어난 계층에서 벗어나 다른 계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하는데, 이 수치가 낮다는 것은 출발선의 차이가 결과의 차이로 굳어지기 쉽다는 의미입니다. OECD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세대 간 소득 탄력성은 주요 선진국 중 높은 편에 속하며, 이는 부모의 소득이 자녀의 소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출처: OECD).
물론 모든 차이를 구조 탓으로 돌리는 건 단순한 시각입니다. 개인의 선택과 노력이 없다면 어떤 구조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제가 느낀 건, 노력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출발선이 애초에 달랐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드라마 속 백성일이 결국 체납세금을 받아내는 장면이 통쾌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건 단순히 악당이 벌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같은 규칙이 자신들에게는 다르게 적용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그 장면에서 잠깐이나마 원칙이 작동하는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드라마가 끝나도 질문은 남습니다. 우리는 정말 공정을 원하는 걸까요, 아니면 자신에게 유리한 공정을 원하는 걸까요. 적어도 저는 《38사기동대》를 통해 한 가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공정한 사회란 모두가 같은 결과를 얻는 곳이 아니라, 최소한 같은 규칙이 같은 기준으로 적용되는 곳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 최소한의 조건이 충족될 때 비로소 사람들은 규칙을 신뢰하고, 그 신뢰 위에 사회가 서게 됩니다. 드라마 한 편이 이 물음을 이렇게 오래 남겨둘 줄은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