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면 그냥 버텨. 다들 그렇게 하는 거야." 이 말,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으시죠? 저는 넷플릭스 D.P.를 보면서 드라마 속 장면보다 이 말이 더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 정말 문제인지, 아니면 애초에 적응하기 불가능한 구조가 문제인지 — 그 질문이 계속 떠나질 않았습니다.
왜 버티기 강요는 고통을 키우는가
D.P.에서 탈영병들이 겪는 상황을 보면 단순히 군 복무 부적응의 문제가 아닙니다. 드라마는 반복적인 가혹행위, 인격 모독, 폭언이 일상화된 환경을 보여줍니다. 그 안에서 힘들다고 말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언제나 비슷합니다. "군대는 원래 다 그래." "나 때도 다 버텼어."
여기서 주목할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정상화 편향(Normalcy Bias)이라고 부릅니다. 정상화 편향이란 현재의 고통스러운 상황도 "원래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문제를 인식하거나 변화를 요구하기 어려워지는 심리적 경향을 말합니다. 군이나 직장처럼 위계가 강한 조직일수록 이 편향이 강하게 작동합니다.
저도 직장 초년 시절에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사람을 끊임없이 응대하고, 감정을 관리해야 하는 환경이 생각보다 훨씬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힘들다고 말하면 주변에서 돌아오는 말은 항상 "사회생활이 원래 그래"였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내가 틀린 건지, 아니면 이 환경 자체가 잘못된 건지.
D.P.의 탈영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버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정상적인 사람도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겁니다.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고통받는 사람만 계속 탓하게 됩니다.
D.P. 속 버티기 강요가 실제로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보여주는 수치가 있습니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군 내 인권침해 신고 건수는 2,200건을 넘었으며, 이 중 상당수가 언어적·신체적 가혹행위에 해당합니다(출처: 국방부). 드라마 속 배경이 2014년이라 지금은 달라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수치를 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조직문화가 개인에게 전가하는 책임
드라마에서 가장 씁쓸했던 장면 중 하나는, 누군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탈영을 한 뒤에도 조직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문제가 드러나도 "특수한 개인의 일탈"로 처리되고, 구조 자체에 대한 반성은 뒤로 밀립니다. 이것이 저는 D.P.가 가장 날카롭게 짚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직심리학에서는 이를 귀인 오류(Attribution Error)와 연결해서 설명합니다. 귀인 오류란 어떤 결과의 원인을 분석할 때, 환경적 요인보다 개인의 성격이나 의지 탓으로 돌리는 경향을 말합니다. "저 사람이 원래 약한 거야"라는 판단이 "이 환경이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거야"보다 훨씬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퇴사를 고민할 때 비슷한 말을 들었습니다. "네가 좀 더 강해지면 돼." 하지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 그 말을 들을 때 오히려 더 지쳐버렸거든요. 강해지라는 말이 응원이 아니라, 지금의 고통을 네 책임으로 돌리는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D.P.가 보여주는 군대 내 가혹행위 문제는 단순히 몇몇 나쁜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조직 내 위계적 권력 구조가 폭력을 묵인하거나 재생산하는 구조적 문제입니다. D.P. 속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겪은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피해 사실을 신고해도 내부에서 묻히거나 역으로 불이익을 받는 구조
- 가해자보다 탈영하거나 문제를 일으킨 피해자가 더 먼저 처벌받는 현실
- "다들 겪는 일"이라는 집단적 정상화 압력으로 인한 피해자의 자기 검열
한국 직장 내 괴롭힘 실태를 조사한 결과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확인됩니다. 직장 내 괴롭힘 신고 건수의 절반 이상이 신고 이후 오히려 불이익을 경험했다는 응답을 보였습니다(출처: 고용노동부). 군대와 직장은 다른 공간이지만, 위계 구조 안에서 고통이 처리되는 방식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
적응 한계를 넘기 전에 볼 수 있는 것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D.P.는 해결책을 직접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현실을 보여주며 불편함을 남깁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불편함이 이 드라마의 진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라마에서 안준호(정해인)가 탈영병을 쫓으면서 변해가는 과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처음엔 임무대로 탈영병을 잡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그가, 사연을 알게 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드라마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고통받는 사람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으면, 단순히 "왜 버티지 못했냐"는 질문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 누군가의 힘듦을 이해하는 것과 공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이해는 "그럴 수도 있겠다"로 끝나지만, 공감은 그 사람의 감각을 실제로 느끼려는 시도입니다. 드라마 속 준호의 변화는 이해에서 공감으로 이동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인지부조화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실제로 보이는 현실이 충돌할 때 느끼는 심리적 불편감을 말합니다. D.P.를 보면서 많은 분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군대는 나라를 지키는 곳"이라는 믿음과, "누군가는 그 안에서 스스로를 잃어가고 있다"는 현실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 충돌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 — 그게 이 드라마를 보는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D.P.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단순히 군대 드라마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 드라마는 군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결국은 어떤 조직이든 사람이 어떻게 망가지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버티라는 말이 위로가 아닐 수 있다는 것, 적응하지 못한 사람보다 변하지 않으려는 환경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는 것 — 이 드라마는 그 불편한 질문을 끝까지 놓지 않습니다. 그 질문을 함께 안고 가는 것, 그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첫걸음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