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68 서른 아홉 (시간의 유한성, 시한부, 삶의 의미) 솔직히 이 드라마를 처음 틀었을 때는 그냥 흔한 로맨스물이겠거니 했습니다. 주인공들이 설레는 눈빛을 교환하고, 어른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드라마 정도로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찬영이 시한부 판정을 받는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은 생각보다 훨씬 묵직했습니다.당연하다고 믿었던 시간에 대하여여러분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내일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저는 중학교 시절 매일 얼굴을 보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같은 교실, 같은 급식, 같은 하굣길. 그 친구와 다퉜던 날도 별로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내일 또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가고 나서는 연락이 점점 끊겼고, 어느 순간 이름은 기억나는데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 .. 2026. 6. 1. 하이쿠키 (열등감, 욕망, 비교) 욕망이 사람을 망친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하이쿠키》를 보면서 정반대 질문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욕망이 없었다면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을까요? 드라마 속 인물들이 선택을 잘못한 건지, 아니면 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건지, 그 경계가 생각보다 훨씬 흐릿했습니다.열등감은 어디서 오는가《하이쿠키》를 보면서 제가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의외로 열등감이었습니다. 드라마 속 학생들이 더 좋은 성적을, 더 높은 위치를 원하며 끊임없이 경쟁하는 장면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고등학교 시절 성적 발표일이면 교실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습니다. 저도 솔직히 말하면 제 점수보다 옆 친구의 점수를 먼저 확인했습니다. 친한 친구가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했던 기억이 지금도 남.. 2026. 6. 1. 허들 (노력의 한계, 어른의 부재, 성장의 의미) 영화 《허들》의 주인공은 고등학생 육상선수다. 실업팀 입단이라는 목표 하나를 붙잡고 훈련과 간병을 동시에 소화한다.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저는 "열심히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게 아니더군요. 이 영화는 노력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노력해도 넘기 어려운 구조에 대한 영화였습니다.열심히 달리는데 결승선이 안 보인다는 것육상 경기에는 퍼포먼스 지표(Performance Metric)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퍼포먼스 지표란 선수의 기록, 순위, 경기 출전 빈도 등 실력을 수치로 환산한 데이터를 말합니다. 실업팀 선발에서도 이 지표가 핵심 기준이 되는데, 영화 속 서연은 간병과 훈련을 병행하면서 자신의 지표가 무너지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습니다.저도 비슷한 감각.. 2026. 5. 31. 코코 리뷰 (망각의 공포, 추억의 역설, 기억과 존재) 솔직히 처음 코코를 틀었을 때는 그냥 아이들 애니메이션이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엔딩 장면이 끝나고 나서 한참 동안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이 영화가 건드린 건 단순한 가족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기억한다는 것이 곧 존재한다는 것이라는, 꽤 묵직한 명제였습니다.망각의 공포 — 두 번 죽는다는 것의 의미코코가 다른 애니메이션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그리는 방식에 있습니다. 픽사(Pixar)는 이 영화에서 사자(死者)의 땅에서도 또 한 번 소멸이 일어난다는 설정을 도입했습니다. 산 자의 세계에서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않게 되는 순간, 사자의 땅에서도 영구히 사라지는 것입니다.영화계에서는 이를 '이중 소멸(Double Oblivion)' 구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중 소멸이란, .. 2026. 5. 31. 인사이드 아웃 (기억 구슬, 슬픔의 역할, 감정 성장) 어릴 때 정말 좋아했던 장난감을 언제부터 찾지 않게 됐는지 기억하시나요? 저도 그런 장난감이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그게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인사이드 아웃》을 보다가 갑자기 그 기억이 떠올랐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단순한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제 안에 쌓인 기억과 감정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사라지는 기억 구슬, 그리고 잊혀진 장난감《인사이드 아웃》에는 기억 인출(memory retrieval)이라는 개념이 시각적으로 등장합니다. 기억 인출이란 과거에 저장된 경험을 현재 의식으로 불러오는 심리적 과정을 말합니다. 영화에서는 이 과정을 색깔 있는 구슬로 표현하는데, 자주 떠올리지 않는 기억은 구슬이 흐릿해지다가 결국 기억 쓰레기.. 2026. 5. 31. 미생이 남긴 질문 (첫 출근, 버팀의 의미, 미생) 버티는 것이 정말 정답일까요? 드라마 《미생》을 보고 나서 저는 오히려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장그래가 회사에서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달린 이야기는 분명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버팀이라는 단어가 항상 미덕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첫 출근, 내가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몰랐던 날들처음 병원에 출근하던 날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새하얀 가운을 입고 복도를 걷는데 발이 바닥에 제대로 붙질 않았습니다. 학생 때 임상 실습(Clinical Practice)은 여러 차례 해봤습니다. 여기서 임상 실습이란 정해진 커리큘럼 안에서 선배 의료진의 감독 아래 환자를 경험하는 교육 과정으로, 책임 없이 배울 수 있는 환경입니다. 그런데 정식 직원이 된다는 것은 완.. 2026. 5. 30. 이전 1 ··· 7 8 9 10 11 12 다음